| 고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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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충남 공주시 유구면 추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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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분류 |
충남지방 문화재 제5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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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향선조 |
3세 충숙공 문극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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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향일 |
음력 10월 1일 1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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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간원은 충숙공(忠肅公) 휘 극겸(克謙) 선조님 묘소가 있는 터에 지어진 원사(院祠)입니다.
현존하는 남평문씨 묘소 중 가장 오래된 묘소인 충숙공 묘소를 중심으로
고간원지, 충숙공 신도비와 재실- 금강재, 고간정사, 충숙공영당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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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간원은 충숙공(忠肅公) 문극겸(文克謙) 선생의 묘소가 있는 터에 지어진 원사(院祠)로서 영정을 봉안한 영당(影堂)이며, 정문의 이름은 망일(望日)이라 한다.
고간은 말고삐를 끌어당기며 간하던(叩馬而諫)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충간(忠諫)에 견주어 유래된 이름이고,
망일은 임금을 향한 충성심이 빛난다는 뜻에서 취한 이름이다. 남평문씨대종회 충숙공유적보존위원회 |
선생의 휘는 극겸(克謙)이요 자는 덕병(德柄)이니 고려 의종 17년(1122) 전라도 남평현에서 태어나셨다.
부친은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인 공유(公裕)인데, 시호는 경정공(敬靖公)이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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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공 신도비 丁巳(1977년)歲暮 문학박사 眞城 李 家 源 謹撰
가원이 일찍이 고려사를 읽다가 문충숙공의 사적에 이르러 무릎을 치며 여러 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이 젊었을 때에 날카로운 의기로 권세부리는 간악한 무리 베기를 청하고 궁중의 올바르지 못한 일을 규탄함으로 그 명성이 온 나라에 떨치었고, 면직되어 서울을 떠나매 청고한 명망이 더욱 높아져서 영특한 풍모와 굳센 결의는 천추에 빛나게 되었다.
* 신도비(神道碑)란 나라에 크게 공헌하며 거룩하게 산 사람의 일생 동안의 업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길이 남기기 위해 세우는 비(碑)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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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 8월이십육일 후손 감찰 학술 근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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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뜰을 치며 간쟁함은 당현의 높은 덕망 특별히 청직하였고 원을
의론하여 이름 붙임은 송상의 장려가 가장 현저하다. 실로 그 선임이
중함에 이름을 이처럼 부름이라 택리를 표하여 충성을 세움은 우럴어보니
전대에 이같았고 철문 두드리며 잘못을 지적함 또한 선철로부터 구해 들음이라.
결연한 충성보임에 교서에 인하여 특별히 간관을 제수하고 운감이
빛에 젖어 다시 훌륭히 세움에 붉은 괴리가 정직함 더욱 덜어나더라.
이미 전왕이 정표의 의 다루었으니 하물며 후손들 추원하는 생각 간정치 않으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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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23년(1590) 3월 일 진사(進士) 이치림(李致霖)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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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정언(正言) 벼슬하던 문극겸(文克謙)이 왕에게 충간(忠諫) 드린 일로 쫓겨나 백의필마(白衣匹馬)로 이 역을 지나다가,
시를 지어 벽에다 썼었다. 마침 역의 다락집을 중수하면서 단청을 한 박(朴)씨는 화상을 그려 벽화로 삼았는데 사람들은 그 그림이 누구를 그린 것인지 몰랐었다. 본 역의 옛 자취는 문헌이 증명해 주어, 오늘에 이르는 천년 뒤까지 그 풍채를 사모하여 우러러봄에, 위엄이 있어 가히 범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이에 관계되는 것을 대략 모아서 취하고 그 시들을 아울러 써 가지고 삼가 고을 수령인 곽 영감(郭令監)에게 고하였다. 영감 곽한(郭維)은 이것을 명이 긴 가래나무에 새겨서 영원히 없어지지 않도록 하였으니, 군자에 이른 서기(庶幾:현인, 어진사람)를 바라보는 것은 풍운(風雲:풍모, 영웅호걸의 출세)의 아름다움을 읊은 것보다 오히려 낫지 않으리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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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재
공주는 즉 호서의 큰 도시이다. 북으로 서울을 접하고 서로는 바다를 통하여 명승으로 일컬으니
사대부들의 루각과 원림이 더러 그 간에 있음을 보겠다.
내가 전일 과거 보러가며 매양 이곳을 지나면서 그 지령과 일걸의 웅장함과 빼어남을 감상하며 탄미하였다.
그러나 이는 심상이 보고 지나는데 불과 하였으니 어찌 족히 이르리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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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판 |
내삼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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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世 충숙공 諱극겸 영정 |
신도비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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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금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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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선문-금강재 입구문 |
고간원터 사적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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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선문(금강제 출입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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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간원 재실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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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간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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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묘제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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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금 접수하시는 남주 영종님과 성금을 내는 일가님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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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문 |
진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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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헌관(경규, 병준, 상배) |
분정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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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례 승열님 |
초헌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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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창 |
집사님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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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헌례 |
종헌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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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제 |
산신제 축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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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복례 |
헌관 기념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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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후 음복-1 |
제사후 음복-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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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발표회(2009년 11월17일 공주문화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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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판 |
공주종친회, 문동호 |
대종회장 광주종친회장 |
사회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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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회장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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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석자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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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충숙공 묘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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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설 |
박주 한잔, 과객의 식단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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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준 부산종친회부회장과 장호 이사 |
집례 신만 부산종친회 부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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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례 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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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으로 중식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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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종인들 기념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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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공 유적보존회 이사회(묘제 전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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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
2004년 |
2004년 |
2002년 |
2001년 |
200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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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달 |
문병달 |
문수상 |
문병달 |
문용호 |
문병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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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충숙공 묘제(11월2일 음10월1일) -문병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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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0 병준총무님과 함께 승합차로
교대앞에 도착하여 버스에 짐을 옮겨 싣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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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충숙공 묘제(음력 10월1일, 11월 12일) -문병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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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5 병준총무와 교육대학앞에 도착하니 대형버스가
대기하고 있었고 회장님, 상근부회장님등 20여분이 도착해 계셨다. 실고온
짐을 버스에 옮기고 오신 분들께 인사를 올리고 오시는 분들과 반가운
인사들을 하면서 출발시각인 06:10 점검하니 예약하신 분중 두사람이
오지 않았는데 병국님만 도착하시어 06:15 출발하였는데 어제 총회를
위하여 칠순고문 병영부회장, 용표자문이 기차편으로 가셨으니 올 때는
좌석 2개가 부족하겠기에 보조의자를 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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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충숙공 묘제(2) -문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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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음력10월 1일 새벽5시 요란한 폰 알람 소리에 황급히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남평문씨
3세조 이신 극겸 선조님의 묘제일 이시다. 묘소가 있는 충남 공주시 유구면 추계리 까지 가려면 새벽부터 서둘지 않으면 안된다 ,
10여분후 또다시 요란한 전화벨 소리가 요동을친다.그저께부터 선조님의 묘제에 함께 참여하기로 약속한 가까운곳에 사시는 종친분 이시다 ,
고맙게도 아드님이 출발장소 까지 모셔드리겠다는 연락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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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충숙공 묘제 11월4일~5일(음력10월 1일) -문병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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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0 헌관과 집사는 전날 도착하라는 통지가 있어 동성제 회의중에
집례를 맏은 신만님, 찬창을 맡은 병준형님 전작을 맏은 청년회 병준씨와
함께 나는 기자 자격으로 함께 출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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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충숙공 묘제 참례기(2) -문용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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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1일(둘째 일요일) 11:00 남문청년회, 35세손 문용호작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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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15일은 음력 10월 초하루였다. "하루의 계획은 아침에,
1년 계획은 정초에..."라는 말이 있지만 옛날부터 추수를 끝내고
조상께 감사하는 달 10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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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도 고간원 묘제 참례기 -문병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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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침 식사 준비를 위해 05:00 종친회에 도착하여 불위에 국을 올려 데우고 준비물과 그릇 등을 갖여 갈수 있도록 준비해 두고 컴퓨터를 만지는데 병준님 내외분이 도착하셔서 함께 준비를 마치고 07:20 도착한 버스에 짐을 실고 경부고속도로에 진입했다. 칠순고문님 경동부회장님 칠준부회장님 상석운영위원님은 전날 출발하시고 버스에 승차한 분은 33분 이시고 경산에서 명규님 부부가 승차 한다고 한다.
07:25 영훈회장님은 윤리운동과 청년회주도로 도덕재무장 운동을 해야한다는 말씀을 하시다가 경산휴게소에 차를 세워 중단되었고, 용표 조카님 내외분이 합류하셨다
이어 부회장님은 동래정씨의 선대 묘소에 대한 전설을 말씀 하시고
07:55 병준자문위원님은 산소에 관한 일화를 말씀 하시는데 금오산에 임금이 날 명당이 있다 하여 장택상씨 부친이 산을 구입하고 지관을 초청하여 찾았더니 박정희의 조부묘 자리라고 하기에 이장하라고 했으나 해방으로 흐지부지 되었고, 다시 옮기라고 했지만 6.25로 무산되었고 이후 장택상씨가 국회의원일 때 박정희준장에게
옮기라고 하였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하여 계속 압력을 행사하던중 군사혁명이 일어나 무산되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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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공묘소 및 고간원 관리 제안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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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2월 4일 종무회의 글 : 문형동 종무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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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제 축문 직함 |
영정 |
고간원 안내판 |
충숙공 안내판 및 고간정사 활용 |
조경 |
경절공 및 경정공 설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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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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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공 선조의 유적에 대해 숭조정신을 발휘하여 보존관리는 물론 治山, 造景 등의 사업에 있어서는, 우리 조상의 유적이기도 하거니와 국가의 문화재로서 품격이 손상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관리․조경하는 일이 바람직하고, 충숙공 선조의 업적과 정신을 옳게 전할 수 있는 안내판과 조형물을 배치함으로서 자손된 도리를 잘하는 것이라 여겨지며, 타성에게도 전범이 되고 자랑스러울 것이기에 위의 내용으로 의견을 제안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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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忠肅公 墓祭 祝文 職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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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축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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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重大匡 三韓壁上功臣 都僉議 元輔 上宰 中書侍郞門下侍中平章事 太子太保 諡忠肅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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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重大匡 三韓壁上功臣 |
高麗 때 文官의 正1品 品階. 高麗初에 開國功臣에게 授與하다 잠시 中斷, 高麗末 忠烈王 34년에 壁上三韓 三重大匡으로 고쳐사용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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都僉議 |
中書省 門下省 尙書省의 3省을 합해서 僉議府라 했던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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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輔 |
領議政의 別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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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宰 |
宰相을 일컬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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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書侍郞門下侍中平章事 |
中書侍郞平章事는 高麗 때 中書門下省의 正2品. 中書侍郞門下侍中平章事는 잘못된 내용. 門下侍中에 가운데 들어갈 수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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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子太保 |
太保는 三公의 하나. 天子의 德을 補完한다는 뜻으로 이름지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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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문 수정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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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宗庭享功臣 權判吏部事 太子太保 中書門下侍郞平章事 修國史 諡忠肅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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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宗庭享功臣 |
明宗 廟庭配享(庭享)功臣의 뜻임. 한 왕조에 壁上功臣은 여러 名이
될 수 있으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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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判吏部事 |
班次 第一의 首相. 고려시대에는 班次第一의 宰相을 首相이라 부르고, 班次第二의 宰相은 二宰 亞相이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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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子太保 |
정1품. 太保는 三公의 하나로서 天子의 德을 補完한다는 뜻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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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書門下侍郞平章事 |
中書省과 門下省의 平章事를 兼하심. 平章事는 朝鮮時代에는 贊成事로 바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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修國史 |
史館의 정2품으로 毅宗實錄을 編纂하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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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忠肅公 影幀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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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의 모습(形)과 내면(影)을 화가가 그린 繪畵를 말한다. 이 초상화는 자손들의 조상숭배 대상으로 갖추어야 할 중후하고 숭고한 면모를 최대한 이상적으로 구현하는데 의의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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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叩諫院 案內板 內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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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간원지(叩諫院址) 기념물 제51호 소재지 : 공주시 유구읍 추계리 산 3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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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
이곳은 고려 의종,명종 때의 인물인 문극겸(1122-1189)의 유적지이다.
선생은 1163년(의종17)에 좌정언으로 왕에게 정치를 바르게 하라는 간곡한 상소를 하다가 지방 판관으로 좌천되었고, 명종 때에도 직간한 뒤 사직하고 낙향하다가 유구역(維鳩驛)에서 죽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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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안 |
이곳은 고려 의종, 명종 때의 인물인 문극겸(1122-1189)의 유적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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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
명종 때에도 직간한 뒤 사직하고 낙향하다가 유구역(維鳩驛)에서 죽었다고 한다.’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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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忠肅公 案內板 및 叩諫精舍 活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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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공 선조의 묘소를 중심으로 影堂과 재실이 갖추어져 있으나 안내판이 없어 누구의 유적인지 방문자에게 친절한 안내를 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TV의 ‘무인시대’ 방영으로 충숙공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 방문객이 많은데 관리면에서 소홀함이 있어 조상의 빛나는 업적을 알리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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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忠肅公 묘소 및 叩諫院 造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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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간원관리위원회에서는 건물의 단청 및 경내 조경을 착수하여 상당한 진척을 보이고 있는데, 한편 묘소 앞의 느티나무 등의 식수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느티나무는 神木으로서 보통 마을 앞의 당산나무로 쓰이고 있는 바 묘소 앞이나 재실 영당 근처에는 식수하면 곤란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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花木九等品階論(강희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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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 : 매화, 국화, 연꽃, 대나무 2등 : 모란, 작약, 파초, 3등 : 동백, 사계화, 종려, 만년송 4등 : 소철, 瑞香花, 포도, 귤 5등 : 석류, 해당화, 장미, 수양버들 6등 : 진달래, 살구, 백일홍, 감나무, 오동나무 7등 : 배나무, 정향목, 목련, 앵두, 단풍 8등 : 무궁화, 석죽, 옥잠화, 봉선화, 두충나무 9등 : 해바라기, 금잔화, 석창포, 화양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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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품 : 소나무, 대나무, 연꽃 2품 : 모란 3품 : 사계화, 월계화, 영산홍, 석류, 벽오동 4품 : 작약, 서향화, 노송, 단풍, 수양버들, 동백 5품 : 치자, 해당화, 장미, 진달래, 백두견, 파초 6품 : 백일홍, 홍철쭉, 두충나무 7품 : 자두, 살구나무, 嬪嬙花, 목련, 향나무, 8품 : 蜀葵花, 山舟花, 옥매, 山薔花, 해바라기 9품 : 옥잠화, 연교화, 초국화, 석죽화, 무궁화, 개나리, 봉선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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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자연물에 의한 상징적 의미의 추구는 동양사상의 영향이나 古事逸話에 관련하여 吉祥的으로 나타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선조의 묘역이나 서원 사당에 길상적인 화목을 심어
자손들이 찾았을 때 은연중에 인품을 수양하는 공간으로 꾸미는 게 하나의 미덕이요 상례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나무가 크게 무성하면 묘소와 영당이재실이 주인이 되지 못하고 숲이 중심이 될 우려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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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징 성 |
소 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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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조 절개 고귀한 기상 부귀영화 고귀 자손번성 무병 무릉도원 탈속초연 10장생 신선세계 辟邪逐鬼 길상 입신출세 四季平安 송구영신 군자 순결 超世 태평성세 학자 무욕 분수 열정 애정 우정 부부금실 융성 번성 순결 |
매화, 난, 국화, 대나무, 소나무, 연꽃, 오동나무 모란, 작약, 배룡나무, 계수, 오동, 닭, 원앙 석류, 포도, 대추, 복숭아, 고추, 밤 복숭아, 자두, 살구, 귤, 석류, 잣나무, 怪松, 거북 해, 산, 물, 돌, 구름, 소나무, 불로초(어성초), 거북, 학, 사슴 주로 假山과 자연석으로 상징 老巨樹, 대나무, 용, 봉황, 곰, 소 소나무, 연꽃, 매화, 버드나무, 감나무, 백합, 梨花, 갈대, 용, 호랑이, 봉황, 학, 백로, 꾀꼬리, 까치, 두견새, 갈매기, 기러기, 물오리 연꽃, 맨드라미, 잉어, 닭 장미 매화, 수선화, 동백(山茶花) 연꽃, 살구 오동, 벽오동, 대나무, 봉황 회화나무 동백, 앵두, 나비, 벌 측백나무 자귀나무, 복숭아, 원앙 무궁화(木槿花)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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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화목품계와 상징성 도표는 이대우(신행정수도 건설기획단 조경담당) 씨의 『風水造景』에서 발췌하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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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敬節公 및 敬靖公 設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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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절공 휘 翼 1세조와 경정공 휘 公裕 2세조 두 선조의 설단은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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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性 문제 |
역사란 한마디로 창조되어질 수 있다. 시조께서 남평에서 태어나시고 본관을 얻으셔 우리 후손들이 일천여 년 동안 남평을 본관으로 삼아 지켜오고 있다.
그런데 만일 공주 유구에 두 선조의 단소가 모셔진다면 백년이나 2백년 후에는 시조는 남평에서 태어나셨으나 경절공과 경정공의 단소가 공주에 있는 까닭이 있을 터이니
1세조부터는 공주에서 시작되었다고 公州誌나 혹은 다른 문헌에 기록해
놓으면 그게 氏族史가 되는 것이다. 씨족사란 후손들이 주장하는 대로 증명될 뿐 역사적으로 조명할 수 없는 맹점을 지니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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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가 아니다 |
두 선조의 단소가 시조 유적산하에 모시는 일은 조금 소홀해도 미안하지 않지만 만일 고간원 우측 공지에 단소를 모신다면 아들과 손자의 故土에서 더부살이가 되어 민망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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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結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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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조 정신을 함양하여 위선사업을 하는 일은 경하할 일이요 대대로 계승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뼈아프게 경험한 일이 있으니, 심사숙고하여 집행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