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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는 같은 씨족의 세계(世系)를 수록한 것으로 한 종족의 혈연관계를 체계적으로 나타낸 책이다. 이는 혈통을 실증하는 귀중한 문헌 이므로 후손으로 하여금 자신의 역사를 알게 하여 조상을 존경하고 종족의 단결을 도모하는데, 기여 하는바 큰 것이다. 우리나라의 족보는 세계에서 부러워 할 정도로 잘 발달된 족보로 정평이 나있으며, 계보학의 종주국으로 꼽힌다. 외국에도 '족보학회'나, 심지어는 족보전문 도서관이 있는 곳이 있는 등 가계(家系)에 대한 관심이 많지만 우리처럼 각 가문마다 족보를 문헌으로까지 만들어 2천년 가까이 기록 해온 나라는 없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의 계보학 자료실에는 600여종에 13,000여권의 족보가 소장되어 있다. ▣ 족보의 의의 족보는 성씨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자료의 하나로 시조부터 역대 조상의 얼과 역사가 담겨져 있으며 같은 성씨를 가진 대부분의 사람이 족보에 실려 있어 나와 집안의 뿌리를 알 수 있는 한 집안의 역사책이다. 이에 따라 옛날부터 족보는 집안의 보물처럼 소중히 간직하고 이를 대할 때는 상위에 모셔놓고 정한수를 떠서 절을 두 번한 후에 경건한 마음으로 살아계신 조상을 대하듯 하였으며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이처럼 소중하게 여겨온 족보가 해방 후 서양화와 지금의 핵가족 제도가 되면서 봉건사상의 유물로만 생각하고 도외시하는 경향이 일고 있다. 그러나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에서, 또 지금도 '근본이 없는 사람' 으로 치부되었을 때 그 하나만으로도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조상들이 족보를 왜 그렇게 소중히 여겼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족보는 '피의 기록이며 혈연의 역사' 이다. 우리 조상들이 목숨을 바쳐가면서 지켜온 족보를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이어야 할 것이다. ▣ 족보의 역사 우리나라의 족보는 중국의 성씨제도(姓氏制度)라 할 수 있는 한식씨족제도(漢式氏族制度)를 근본으로 삼고 발전하여 정착했는데, 그 시기는 1000 여 년 전인 신라 말·고려 초기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삼국사기나 옛 문헌에 보면 고구려나 백제 계통의 성(姓)은 그 계보(系譜)가 후대와 거의 연계되고 있지 않으며 다만 신라의 종성(宗姓)과 육성(六姓)[이(李), 최(崔), 정(鄭), 설(薛), 손(孫), 배(裵)] 및 가락국계(駕洛國系)의 김해김씨(金海金氏)만이 후대의 계보(系譜)와 연결됨을 알 수 있다. 그 이후로부터는 귀족 사이에서 가첩(家牒)이나 사보(私報)로 기록하여왔는데, 이러한 가계기록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중기에 오면서 족보형태를 갖추는 가승(家乘)· 내외보(內外譜)· 팔고조도(八高祖圖)로 발전 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족보는 고려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으로 고려 의종(18대, 1146~1170)때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이 처음이다. 그러나『고려사』를 보면 고려 때에도 양반 귀족은 그 씨족계보를 기록하는 것을 중요시하였고, 제도적으로 종부시(宗簿寺)에서 족속의 보첩을 관장했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귀족 사이에는 계보를 기록 보존하는 일이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사대부 집안에서 사적으로 간행되기 시작하였으나, 1476년(조선 성종7년)의 『안동권씨 성화보(安東權氏 成化譜)』가 체계적인 족보 형태를 갖춘 최초의 족보이다. 이후 1565년(조선 명종20년)에는 『문화유씨 가정보(文化柳氏 嘉靖譜)』가 혈족 전부를 망라하여 간행되면서 이를 표본으로 하여 명문세족에서 앞을 다투어 족보를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7세기 이후 여러 가문으로부터 족보가 쏟아져 나오게 되었으며 대부분의 족보가 이 때 만들어 지기 시작했다. 조선 초기에 간행된 족보의 대부분은 족보간행을 위해 초안을 하고 관계 자료를 충실히 보완한 뒤 간행에 착수하여 내용에 하자가 없었다. 그러나 이후의 족보들은 초안이나 관계 자료의 검토, 고증도 없이 자의적으로 기록하여 간행된 것이 많았다. 그리하여 자의적인 수식이 가하여 졌음은 물론이며 조상을 극단적으로 미화하고, 선대의 벼슬을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조작하고, 심지어 명문 집안의 족보를 사고 팔거나 훔치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족보를 간행함으로써 자신의 가문의 격을 높이려는 마음에서 야기된 것이었다. < “뿌리를 찾아서”에서 일부 인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