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운 문양목(憂雲 文讓穆)
재미 독립운동가 휘 양목 선조님은 1869년(고종6년) 충남 태안에서 태어나셨으며
충선공 휘 익점 선조님의 18대 손으로 호는 우운(憂雲), 휘는 양목(讓穆)입니다.
휘 양목 선조님은 1894년 갑오 동학농민 혁명군으로 여러 전투에 적극 가담했으나
혁명실패로 체포 구금되어 죽음의 형장으로 끌려가던 중 극적으로 탈출하여 인천으로 피신하셨다가,
1905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이민 망명하신 후, 미국 전역에서 수많은 독립운동을 전개하셨던바,
미국 본토의 대표적인 국권회복단체인 대동보국회를 결성 중앙회장으로 활동하심을 비롯,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대동공보사 사장 겸 발행인, 대동신서관 사장, 신민일보 주필 등을 역임하시면서
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의 한인 군사학교, 소년병학교, 해외독립군의 군인 양성을 적극 지원하셨고,
이승만의 “독립정신”, 박용만의 “국민개병설(國民皆兵設)”과 “군인수지(軍人須知)”를 간행 보급하는 등
미국 교민의 권익증진과 일제 침략규탄, 구국의지의 애국정신, 민족정기의 국가관 고취에 불철주야 헌신하셨습니다.
특히 1908년 대한제국 외교고문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제의 대한 침략을 공식적으로
정당화하기에 급급하므로 이에 전명운, 장인환 의사가 살해 처단하였는바,
양목 선조는 시종일관 이 거사의 주역으로 활약하셨습니다.
이는 곧 우리 독립역사상 해외 그것도 미국에서의 첫 무력 독립 쟁취사건으로 한민족 독립정신과 정의감을
세계만방에 떨치는 의열투쟁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휘 양목 선조님은 동학에 심취하여 일찍이 개화에 눈을 뜬 유림선비로 항쟁에 투신한 선각자였고,
망명 이후 수많은 논설과 기고를 통하여 동포들이 대동단결하도록 강력한 항일 독립투쟁 문필을 휘날린
위대한 언론인이었으며,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이길 수 있다고 가르치고 밀어주고 앞장선 실천적 교육자로써
조국 광복을 위하여 평생 몸 바치신 분입니다.
그러나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시고 망국의 통한을 가슴속 깊이 품으신 채 1940년 12월 25일 71세를 일기로
멀리 타국에서 서거하시니 많은 재미동포들의 애도 속에 샌프란시스코 공동묘지에 안장되어 영면하셨습니다.
그간 지사의 유해봉환을 위하여 향리의 문양목기념사업회가 주축이 되어 여러 해 동안 많은 노력을 한 결과,
광복 80주년을 맞이하여 지사가 조국을 떠난 지 120년 만에 유해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귀환하게 되었습니다.
2025년 8월 13일
- 서울 동작동 현충원에서 국무총리가 참석한 유해봉환식이 있었으며
- 충남 태안 생가터(충운사)로 옮겨 많은 주민과 일가들이 참석하여 추모제를 지낸 후
- 대전 국립 현충원으로 이동하여 안장식를 갖고 안장되셨습니다.
이날 행사에는 미국에 거주중인 손자 및 증손 9명이 귀국하여 함께 했으며,
향리에 있던 부인 김해김씨 묘도 파묘하여 대전 현충원에 합장하였으니 실로 120년만에 부부가 상봉한 셈입니다.
정부는 광복 50년 경과된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2004년에는 국가보훈처, 독립기념관,
광복회가 6월의 인물로 선정하였으며, 미국 LA에서 역사학을 연구하는 안영주 박사를 초청하여 양목 선조의
공훈선양 학술강연회를 개최하였고, 이어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는 1개월간 공의 독립활동을 담은 자료를
계시하는 등 양목 선조님의 독립운동 정신을 새롭게 조명하였습니다.
휘 양목 선조의 고향인 충남 태안군에서는 2010년 생가지를 충청남도 문화재 403호로 지정하고
진입도로 이름을 양목 선조의 호를 따서 우운로(憂雲路)로 정하였으며,
2015년 향리의 문양목기념사업회에서는 사당 충운사를 건립하여 해마다 추모제를 거행, 선조의 업적을 기리고 있습니다.
관련 서적으로는 문양목선생기념사업회가 발행한 책 “문양목 평전-최재학 지음” 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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