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탐구

  • 나의 계보 확인
  • 문씨대종회
    조회 수: 1231, 2017.02.25 10:12:15
  • 자료에 의한 나의 계보확인

     

    1. 서론

     

    나의 족보를 살펴보면서 나의 계보는 내가 직접 확인하고자 한다면 어디까지 확인할 수 있을까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여러분들도 자신의 계보를 스스로 확인해 보겠다고 생각하여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실제 확인해 보려고 노력해 보신 적은 있는지요?

     

    우리 문씨는 시조 무성공 휘 다성 이후, 오래전부터 활발한 활동을 하여 온 것으로 알려져 왔다.

    역사서에는 구체적으로 문씨가 나타나는 시기는 고려 건국 당시부터이나, 중시조인 경절공 휘 익이 역사서에 나타나기는 1095년부터이다.

    경절공은 4남을 두었는데, 차남인 정경공 휘 공원, 사남인 경정공 휘 공유의 묘지명이 발견되었다.

    묘지명에는 간단한 계보에 대한 기록이 확인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휘 공유의 묘지명에는 가첩이라는 용어까지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12세기부터 계보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고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은 정경공 휘 공원의 묘지명 중 일부이다.

    공은 남평군(南平郡) 사람으로, ()이 그의 성이고, 공원(公元)이 그의 이름이다.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의 아들이고, ▨▨ 신호위대장군 행초맹중랑장(神虎衛大將軍 行抄猛中郞將) 의 손자이다. 증조 은 관직이 ▨▨인데 명망이 높아 세상에 알려져 있다. 어머니 유씨(柳氏)는 어질고 덕이 있어 항상 공을 의()로써 가르치니, 바야흐로 옛말에 능히 효자로 하여금 충신이 되게 한다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公南平郡人 文其姓 公元其名 盖右散騎常侍翼之子 ▨▨神虎衛大將軍行抄猛中郎將之孫也 曾祖諱▨▨高其名望著于世 母柳氏有賢德常敎公以義 方古所謂能令孝子作忠臣(문공원의 묘지명 중에서)

     

    다음은 경정공 휘 공유의 묘지명 중 일부이다.

    공의 선조는 문반직과 무반직으로 조정에 벼슬을 하였는데, 조부, 증조부, 고조부에 대해서는 가첩(家牒)에 갖추어 기록되어 있으므로 여기에 다시 적지는 않는다.

    公之先世以文虎膴仕於朝皇祖曾高 在家牒此不復錄 (문공유의 묘지명 중에서)

     

    그러나 그 당시의 가첩 등은 전하지 아니한다.

    편린적인 기록으로 묘지명이나 당시 기록으로 보이는 문집, 기타 문헌이나 기록 등에 의하여 일부나마 그 실체를 알 수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을 뿐이다.

     

     

     

    2. 남평문씨 족보

     

    남평문씨 족보는 1731년에 처음 간행되었다. 이를 신해년에 간행되었다 하여 신해보라 불리우기도 한다.

    그렇다면, 12세기 이후에 처음 가첩이라는 기록이 보인 이후, 18세기에 족보가 처음 작성되었으니

    그 사이 6세기 동안 남평문씨의 기록은 어떻게 유지되어 왔으며, 신해보 간행 이전의 기록들은 어디로 갔을까?

    사서에 나타나는 훌륭하신 선조님들을 족보에서 찾아보고자 하여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로써 족보 기록이 완전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신해보 이전에 작성된 족보나 가첩은 전혀 없을까?

    신해보 이전의 기록으로는

    임진란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모계 휘 위(충혜공파)의 모계가첩,

    정유재란 중에 송암에 의하여 작성된 사성강목 중 남평문씨 기록,

    극제 문 환이 작성한 파산 가승 등이 현존할 뿐이다.

    그 이외에 서명(書名)만 전하는 가승도 몇 종 더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족보에 수록된 선조님들에 대한 기록은 물론, 사서에 나타나는 훌륭하신 선조님들의 행적을 살펴보고자 하여도

    현존하는 가첩 등 또한 조선에 들어와 작성된 것들이므로 사실상 과거의 기록들을 추적하기란 쉬운 일도 아니다.

     

     

    3. 나의 계보를 찾아서

     

    그러므로 족보에 대한 기록에 의문이 있다고 하여도 그 내용을 살펴보기 어려운 것이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나의 계보 기록은 어떨까? 내가 확인할 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내 스스로 나의 계보를 확인해보기로 하였다.

     

    1) 족보의 기록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누구나 족보 기록일 것이다.

    나도 역시 우리 집안에서 참여한 족보부터 살펴보았다.

    나의 선조님들은 1731년 신해보부터 참여하셨다.

    그후 우리 집안이 참여한 족보를 대략 살펴보면,

    조선시대에는 1792년 임자보, 1851년 후신해보, 1870년 경오보, 1901년 경자보 등을 거쳐,

    일제 때의 갑자보,

    해방 후에는 파보로 1953년 계사파보와 1976년 병진파보에 참여하셨고.

    최근에는 1982년 임술대동보와 1995년 을해대동보까지 적극적으로 족보에 참여하여 오셨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1995년 을해대동보는 조부님의 명에 의하여 내가 직접 참여하였다.

     

     

     

    1) 가족관계등록부 (2008년 이후)

     

    족보를 살펴보았으니, 이제 나 스스로 확인해 볼 단계이다.

    가장 먼저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공부(公簿)이다.

    나의 계보를 확인할 수 있는 공부로는 가족관계등록부가 있다.

    가족관계등록부 중,

    가족관계증명원을 징취하여 보니, 부모, , , 아들만 나타난다.

     

    그렇다면 그 위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참고로 가족관계증명원은 주민센터에서 교부받을 수 있는데, 본인이나 위임받은 사람만 가능하다.

     

    2) 제적등본 (1909년부터 2007년까지)

     

    가족관계등록부 이전에는 호적이라는 명칭으로 통용되었다.

    호적은 훼손을 막기 위하여 여러 번 이기되었었는데, 이기 전 기록, 즉 폐쇄된 기록을 제적등본이라고 한다. 이 용어는 현재도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2007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자신의 제적등본이 존재한다.

    따라서 나의 제적등본을 떼어보면, 호주 이하 가족관계 사항이 모두 나타난다.

     

    만약 호주가 아버님이시라면,

    다시 아버님의 제적등본을 떼어보아야 한다.

    아버님의 제적등본상 호주가 조부님이시라면, 다시 조부님의 제적등본도 떼어보아야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계속 제적등본을 교부받아 확인함으로써

    공부상 나의 계보가 확인 가능하다.

     

    나는 위와 같은 방법으로 아버님, 조부님, 증조부님과 증조부님의 호주이신 고조부님까지의 계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계보와 관련하여 중요한 점은 묘소이다.

    자기 집안의 묘소를 어디까지 관리하고 있느냐이다.

    나의 경우는 고향 선산에 5대조까지 모셔져 있으며, 6대조는 고향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모셔져 있다..

    그러므로 사실 공부를 징취하지 않아도 나는 묘소에 의하여도 6대조까지는 확인이 되지만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하여 공부를 징취하였다.

     

    나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처갓집의 공부, 외가의 공부, 진외가(할머니 외가)의 공부까지 징취하여 계보를 좀 더 확실하게 알아 보았다.

     

    다만, 제적등본을 징취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 이유는 폐쇄된 호적제도는 1909년에 민적부라는 명칭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적등본도 1909년 당시 생존하셨던 분까지만 가능하다는 한계점이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제적등본에 의하여 대부분 1800년대 중반까지는 계보확인이 가능하다.

     

    또 하나는, 625사변, 남북분단, 화재 등의 이유로 공부가 분실된 경우도 있다.

    공부는 작성시점부터 법원과 행정기관에서 보관하고 있었으므로 두 곳이 모두 분실되지 않는 한, 어느 한 쪽에서는 징취가 가능하다.

     

    참고로 민적부는 처음에는 조선 민족을 강압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목적으로 경찰에서 관리하였다가

    1919년 기미독립사건 이후 무단정치에서 후퇴하면서 사법 및 행정기관으로 이전하였는데 이전한 이후부터는 호적부라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3) 호적

     

    . 기본 이해

     

    개인에 대한 호적관리는 오래되었다. 1909년 이전 조선시대는 물론 고려시대에도 개인에 대한 호적은 있었다.

    다만, 1894년 갑오개혁 이전에는  노비 중, 일부를 제외한 양인들에게만 호적이 있었다.

    노비는 인간이 아닌 물건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노비에게는 노비문서가 존재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옛 호적을 보관하고 있는 후손은 많지 않다.

     

    . 1896년부터 1909년까지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공사노비제도가 전면 폐지되면서

    국가에서는 노비들에게도 호적을 작성할 필요가 있게 되어, 1896년에 신호적을 작성, 민적부가 시행된 1909년까지 사용되었었다.

    아쉽게도 우리 집에는 이 기간 동안의 호적은 살펴볼 수 없어, 당시의 다른 호적을 구하여 호적의 형식을 살펴보는 것만으로 만족하여야 했다.

     

    . 1896년 이전

     

    우리 집에는 신해보에 처음 참여하신 휘 재강님 (1692년 출생) 이하 10여건이 넘는 선조님들의 호구단자를 보관되어 왔다.

    이러한 이유로 나의 경우는 집에 보관되어 있는 호구단자 만으로 5대조 휘 세찬 이상 계보를 살펴보는데 큰 도움이 된다.

     

    아마도 우리 집안은 재강님의 세 째 아들 후손이기 때문에 당시 대부분의 서류는 장자 집안으로 전해지고,

    우리 집안으로 전하여진 서류는 재강님의 호적 1부와 일부 문건만 전하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이유는 우리 집에 장자 집안으로 전하여진 모든 문건이 1899년 대화재로 소실되었다는 기록(소지 : 관에 올린 상소)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경우, 휘 재강님의 호적에 근거하여 공부상으로는 휘 재강님의 부, 조부이신 휘 계장, 증조부와 외조까지 계보확인이 가능하다.

     

    . 신해보와 비교

     

    신해보 기록을 살펴보면, 휘 계장까지는 물론, 계장의 부친이신 휘 경추의 기록까지도

     호구단자에 의한 방법, 4(四祖)까지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신해보 작성 당시 휘 경추님의 호적도 보관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휘 경추님의 부, , 증조까지의 기록도 충분히 호적에 의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4. 결어

     

    위와 같은 방법으로 나는 나의 계보를 인터넷족보상 17세이며, 나의 15세조인 휘 백()까지의 계보는 최소한 완벽한 계보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서도 자신의 완벽한 계보를 찾아보시는 시간을 가져보시면 어떨까요?

     

    다음에 우리 집안의 호적 등도 올려 볼 예정입니다.

     

     

    2017년 2월 25

    소천 문 점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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