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탐구

  • 인터넷상에 글을 올릴 때 주의할 점
  • 문씨대종회
    조회 수: 107, 2018.06.11 06:25:18
  • 인터넷에 올라온 글들을 읽다보면 조금 더 신경을 써서 올렸더라면 하는 생각이 드는 글들이 있다. 이러한 글들은 크게

    가. 하나의 사실을 서로 달리 기록하고 있는 경우,
    나. 근원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잘못 올리는 경우,
    다. 상계논란에 대한 주장 등이다

    다음은 2018년 3월 24일에 네이버 지식in에 답변으로 올라온 글 중의 일부이다. 원문은
    https://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130105&docId=297823878&qb=7ISc7JiIIOusuOqzteycoA==&enc=utf8&section=kin&rank=1&search_sort=0&spq=0&pid=TxxUclpySoosscSSzoCsssssstV-262442&sid=UB4J1is8UvhJS%2B%2BCHyIbxA%3D%3D 에서 볼 수 있다.

    첫 째, 관직명을 일치시키지 않은 사례.

    자료 1)
    문극겸에게는 벼슬이 합문지후(閤門祗侯)에 오른 장자 문후식[충렬공](이 있다)
    자료 2)
    문후식(文候軾) (高麗 諡號 : 忠烈 官職 : 兵馬使)
    1177년(명종 7) 문과에 급제, 한림원 학사로 여러 관직을 거쳐 (정7품)합문지후ㆍ(정4품)이부시랑ㆍ(정6품)전중내급사를 역임하고, 1198년(신종 1) (정3품)대부경 동북면 지병마사가 되었다.

    검토 내용)
    문후식의 (최종) 관직을 자료1)은 (정7품)합문지후로, 자료2)는 (정3품)대부경 동북면지병마사로 서로 달리 기록하고 있다. 문후식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 세가 권 제21 신종원년의 기사, 즉 “대부경 문후식을 동북면지병마사로 임명하였다”라는 기록이 유일하다. 그렇다면, 사서에 근거하여 기록하였어야 한다. 즉 자료1)의 인용은 검토없이 사용된 전형적인 오류이므로 (정3품) 대부경 혹은 병마사로 기록되어야 한다.
    잘못된 내용임이 발견되었음에도 잘못된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은 선조님에 대한 불경이라 할 것이다.

    둘 째, 휘를 일치시키지 않은 사례

    자료 1)
    충렬공 문후식은 문탄(文誕)과 문작(文綽) 두 아들로 인맥을 이었다.
    충선공(忠宣公) 문익점(文益漸)은 문탄(文誕)의 6세손이 된다.
    자료 2)
    4세 : 문후식(文侯軾)
    5세 : 문정(文挺)

    검토 내용)
    인터넷에 올리는 글은 혼동이 되지 않아야 한다.
    자료에서 나타난 휘 정(挺)과 휘 탄(誕)은 동일인이다. 그러나 이를 모르는 사람은 휘 정(挺)과 휘 탄(誕)을 서로 다른 사람으로 볼 수 있다. 이 또한 의계보의 연장선 상에 있다. 즉, 의계보를 인정하지 않는 족보에서는 휘 정(挺)으로 기록하여 왔으나, 의계보를 인정하는 계보는 휘 정(挺)을 인정하지 않고 휘 탄(誕)으로 기록한다. 이와 같은 이유는 의계보 중에 휘 정(挺)이 수록되어 있어 피휘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느 휘가 타당한지 여부를 떠나 문정과 문탄은 동일인임을 표시하여 서로 다른 사람으로 보는 혼동을 없애야 할 것이다.

    자료 3)
    충렬공 문후식은 문탄(文誕)과 문작(文綽) 두 아들로 인맥을 이었다. 이 문작(文綽)이 바로 제주도(濟州道) 입도조로서 남제공파를 형성한 파조(派祖)가 된다.
    자료 4)
    4세 : 후식(候軾)
    5세 : 착(착)

    검토 내용)
    위 내용도 같은 흐름이다. 1568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하는 필사본에는 휘 작(綽)으로 기록하고 있다. 1920년에 작성된 경신보는 휘 착(言卓)으로 기록하면서 일명 휘 작(綽)으로 기록하였다. 따라서 휘 작과 휘 착도 동일인임을 기록하였어야 혼동이 없을 것이다.

    세 째, 잘못된 자료를 인용한 사례

    자료 1)

    인용 2.jpg



    검토 내용)
    현재 인터넷대동보 항렬은 위 표에서 2세를 차감하여야 한다. 남평문씨 대동항렬은 1870년 경오보에서 처음 제정되었다. 당시 항렬도는 항렬자를 정하면 후손이 증가하면서 동명이인이 많이 나타날 것을 고려하여 위 표상 33세에 해당하는 항렬을 수(水)로부터 시작하는 상생오행의 변이 있는 글자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50년 후에 간행된 1920년 경신보에서 경오보의 뜻을 살리면서도 위와 같은 항렬표 즉, 32세를 추가하여 부터 44세까지 각 항렬자 셋씩 결정하여 수록하였다. 그 후 산발적으로 경신보의 기록을 인용하여 오다가 1988년 대동계승보에서 이를 인용함으로써 위 항렬표가 널리 인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경신보에는 없던 45세 항렬자가 출처 불명으로 첨부되었는데 이는 항렬에 맞지 않는 오류이다. 따라서 잘못된 45세에 대한 항렬표는 삭제되어야 한다.

    네 째, 상계논란.

    자료 1)
    남평 문씨의 가장 오래된 기록인 휘(諱) 공원(2세) 선조의 지석과 묘지명에 근거하여 대종회 상고위원회에서 諱천강(天降)~정(正)의 12대는  의계로 처리하는 내용을 밝히고 합의하기를 경절공 諱 익(翼) 선조(先祖)를 1세(중시조, 기세조)로 하여 대동보(大同譜)를 제작(製作)하고 재론하지 않기로 하였으나
    자료 2)
    남제공파는 불복하여 참여하지 않았고 이후(以後)에 발행(發行)된 남제공파보와 시중공파보에는 의계를 넣어 파보(派譜)를 만들었으나 대종회(大宗會)에서는 아무런 조치(調治)가 없었습니다.
    자료 3)
    충선공(諱 익점) 선조(先祖)는 충숙공의  몇 대손이 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종전의 족보에는 충숙공의 7대손으로 기록하여 왔으나, 1983(임술)년과 1995(을유)년 발행된 대동보는 9代손으로 기록하였습니다. 6세 중연(仲連), 7세 장영(章永) 두분을 삽입하고 12세로 하니 9대가 되었습니다.
    6세 중연(仲連) 선조는 생졸년과 배위 기록이 없고 벽상공신 상주국 문하시중이라 적었고, 7세 장영(章永) 선조도 생졸년과 배위 기록이 없고 문과 급제 후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았다라고 기록하여 다른 선조들의 기록에 비해 부실한 편입니다.
    자료 4)
    2009년 남제공에서는 남제공파는 물론 충선공파까지 의계와 7-9대 문제(問題)까지 넣은 책을 만들었습니다. 이에 대한 대종회(大宗會)의 결정도 지켜볼 일입니다만, 대수를 다시 정의함은 일가님들께 혼란을 주는 일이나 겪어야 할 일이라면 빠른 것이 좋습니다.

    검토 전에)
    자료2)와 자료4)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남평문씨 상계논란에 대하여 이미 대종회에서 결정된 바 있다. 대종회의 결정은 모든 종인들이 지켜야 할 불문율로서 강제성은 없다할지라도 대종회는 남평문씨 종사의 일원화를 위하여 대종회에 종무위원회를 두어 결정하고 있다. 따라서 대종회 결정은 남평문씨 모든 종인들의 의결사항이라 할 것이므로 비록 일부 문중에서 불만이 있다고 하더라도 대종회의 결정을 따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물론 대종회의 결정과 다른 의견이 있다면, 대종회에 객관적인 자료를 제출하여 종무위원들의 판단을 요청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내용을 살펴보자

    검토 내용)
    1. 의계
    자료1)은 의계논란에 대한 부분이다. 1808년에 간행된 무진신보에서 일첩(가첩) 3건에서 나타난다면서 의계보를 수록하였으나, 무진신보 또한 이는 의심스러운 계보이므로 정계에 포함시킬 수 없어 의계보라 칭하고 별도 기록한 것이 의계 논란의 최초이다. 그 후, 무진신보 간행에 관여한 계항을 중심으로 의계보에 대한 정계 포함여부 논란이 약 5-60년 정도 지속되어 오다가, 1870년 경오보에서 의계보를 정계에 포함시킨 이후 1955년 을미보까지 약 85년간 수록되어 왔다.
    1956년 전국의 남평문씨들을 대표하는 남평문씨대종회가 창립된 이후, 1959년 정유대동보 간행하면서 의계보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의계보의 내용은 믿기 어려운 내용으로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용면에도 많은 오류가 발견되었다.
    가장 기본적인 오류는 의계보의 10세 휘 중달(仲達)은 삼국통일기의 인물인데 반하여 11세 휘 극유(克裕)는 고려인으로 10세와 11세의 터울이 300여년 정도다. 다시 말하면 의계보는 통일신라시대의 기록이 없으니, 10세와 11세는 부자간이 될 수 없다. 과거에는 이러한 무리가 있음에도 의계보를 연계하여 왔으나, 대종회는 의계보의 오류와 모순점 등을 발견한 이후, 1959년 정유대동보부터 지금까지 의계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2. 7대ㆍ9대설
    자료2)는 7대ㆍ9대 논란에 대한 부분이다. 7대ㆍ9대설이란 충선공 휘 익점이 충숙공 휘 극겸의 7대손인가 아니면 9대손인가 하는 논란으로 이 역시 의계보 논란의 연장선상에 있다. 1731년에 간행된 신해보 이후, 9대설에 의거 기록하여 왔었으나, 의계보가 나타난 이후, 일승 등에 7대손으로 기록되어 있다며 계항을 중심으로 7대설을 주장하였다. 1870년 경오보에서 의계보와 의계보에 따른 7대설을 인용, 1955년 을미보까지 기록하여 왔었으나, 대종회 창립 이후, 의계보의 모순점을 발견한 이후, 정유대동보에서 신해보의 기록에 따라 의계보를 제외함과 동시에 9대설로 기록하여 오다가 2012년 대종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유로 7대설로 의결한 이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첫 째, 충숙공과 충선공의 생년차이는 209년이다. 1세대를 30년으로 본다면 9대보다는 7대가 타당하다
    둘 째, 충선공과 동시대에 활동한 충숙공의 후손인 달한, 이성계와 비교하여 보더라도 달한과 이성계 모두 6대손이다. 따라서 9대손이라기 보다는 7대손이 타당하다.

    2018년 6월 11일 아침에 소천 문점규 씀

댓글 0 ...

http://moonsi.cafe24.com/xe/bord09/334343
번호
제목
이름
29 문씨대종회 11 2019.05.12
28 문씨대종회 138 2018.07.30
문씨대종회 107 2018.06.11
26 문씨대종회 69 2017.10.07
25 문씨대종회 259 2017.10.04
24 문씨대종회 139 2017.09.25
23 문씨대종회 188 2017.06.09
22 문씨대종회 1185 2017.02.25
21 문씨대종회 914 2016.07.22
20 문씨대종회 166 2016.04.24
19 문씨대종회 209 2016.04.24
18 문씨대종회 778 2016.04.16
17 문씨대종회 432 2016.04.16
16 문씨대종회 191 2016.04.15
15 문씨대종회 265 2016.04.15
14 문씨대종회 53 2016.04.15
13 문씨대종회 212 2016.04.15
12 문씨대종회 287 2016.04.15
11 문씨대종회 130 2016.04.15
10 문씨대종회 227 2016.04.15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