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탐구

  • 시조 탄강설화 1회
  • 문씨대종회
    조회 수: 157, 2017.09.25 18:07:16
  • 시조 탄강설화 (1)


      남평문씨 시조 탄강설화는 족보를 비롯하여 여러 문헌에 산재되어 나타나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약간씩 다름을 알 수 있다.

    시조 탄강설화니까 하면서 치부하기보다는 각종 문헌에 수록된 탄강신화를 살펴보면서 그 내용을 이해하여 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탄강설화는 탄강 전의 상태, 탄강과정, 탄강 후 성장 및 성인으로서 활동과정, 기타 사망 후 및 배우자 등으로 이루어지는데

    이와 같은 점을 고려하면서 문헌에 나타난 시조 탄강설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시조 탄강설화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은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시조 탄강설화는 1597년에 작성된 사성강목, 1629년에 작성된 파주보, 1731년에 작성된 신해보 등이 시조 탄강설화의 원형으로 보여진다.

     이후 탄강설화는 파주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1792년 임자보와 임자보의 영향을 받은 1808년 무진신보를 거쳐 시조 탄강설화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이외에도 사성강목에 앞서

    가정(嘉靖, 1522-1566) 말에 장단 문선창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문씨일승,

    모계 문위에 의하여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만력(萬曆, 1572-1620) 년간의 모계가첩,

    1597년에 참봉 문진강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이천가보와

    파주보 작성 이후인 1661년(현종 신축년)에 문희석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희석보 등이 알려져 있으나,

    모계가첩 외에는 현존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며, 현존하는 모계가첩에는 탄강설화가 수록되어 있지 않다.


      또, 만성보 성격의 종합성씨보가 임진란 이후에 작성되기 시작하였는데,

    성원총록, 만성보, 씨족원류, 잠영보, 지원보, 궁원보, 만성총보, 만성보총 등이 이러한 문헌이다.

    위 문헌 중, 씨족원류를 제외한 문헌은 전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며,

    종합성씨보에도 시조 탄강설화가 전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문헌들도 있으나,

    씨족원류에 시조 탄강설화가 수록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종합성씨보에는 시조탄강설화가 수록되어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할 것이다.


      이하 각 보첩에 수록된 시조 탄강설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1597년 사성강목

      사성강목91.jpg

      문헌에 기록된 시조 탄강설화에 대한 최초 기록은 1597년에 송암 이로가 작성한 “송암세보 사성강목 (약칭하여 ‘사성강목’이라 한다.)”에 수록되어 있다.

    탄강설화 끝에 탄강설화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데, 응주로부터 채록하였다고 한다.

     나아가 서두에 “세상에 전하기를, 남평문씨는 바위 틈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우리의 시조이다.”라고 기록함으로써

    예전부터 구전되어 왔었음과 함께 “준원전 참봉 응주의 말이다.”라는 기록에 의하여 송암이 탄강설화를 채록한 응주는 아마 남평문씨의 후손일 것으로 추정된다.


      사성강목에 수록된 탄강설화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원조 삼중대광 벽상삼한공신 동평장사 휘 다성
      세상에 전하기를, 남평문씨는 바위 틈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우리의 시조이다.


      군주가 어느 날 강에서 뱃놀이를 즐기고 있었는데,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높은 절벽 위로부터 들려왔다.

    사람을 시켜 올라가 그 곳을 살펴보게 하였더니 돌로 된 상자가 있었다.

    굵은 끈으로 묶어 아래로 내렸더니 그 안에는 옥설처럼 피부가 하얀 어린 아이가 있었다. 군주가 기이하게 생각하여 그를 길렀다.


      점차 자라면서 문사가 솟아나고 무략이 뛰어나므로 드디어 문(文)을 성(姓)으로 하고, 다성(多省)을 이름으로 하였다. 28세에 삼한공신이 되었다.


      후손들은 호남에 거주한다. 준원전 참봉 응주의 말이다.


      위 탄강설화는 탄강전, 탄강, 성장과정 및 득성, 활동과정을 단락으로 구분하여 보았다.

    이하 탄강설화도 같은 방법으로 구분하고자 하니 비교하여 살펴보면 그 차이점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위 탄강설화는 주제는 “南平之文”이라 하여 지역적으로는 남평, “遊江上”이라 하여 물, “懸崖上”이라 하여 높은 장소 등, 크게 3가지 범위를 벗어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2. 1629년 파주보

      파주보 91.jpg

    파주보는 사성강목보다 불과 32년 후인 1629년에 극제 환에 의하여 작성된 가승인데,

    파주보에도 역시 탄강설화를 기록하고 있음이 발견된다. 파주보에 수록된 시조 탄강설화는 대략 다음과 같다.


      시조 삼중대광 삼한벽상 이등공신 문다성
      남평군에는 큰 연못이 있으며, 연못 곁에는 천 길이나 되는 우뚝 솟은 바위가 있었다.


      군주가 어느 날 연못에서 뱃놀이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린 아이 울음소리가 바위 위로부터 들려오거늘

    즉시 사다리를 만들도록 명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올라가서 그 곳을 살펴보게 하였더니 돌로 된 상자 속에서 울음소리가 들리는지라,

    동아줄로 묶어 아래 내려 열고 그 속을 보았더니 옥설 같은 피부를 가진 어린아이가 있었다.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여 드디어 그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3살에 문사가 뛰어나고, 9세에 무략이 뛰어나니 드디어 문(文)을 성으로 하고 다성(多省)을 이름으로 하였다. 18세에 삼한공신이 되었다.


      위 내용 중, “有巖斗起千丈”에서 “千丈”은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과장법으로서 “매우 높다”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뒤에 설화를 읽다보면, “千丈”을 “十丈”으로 바꿔 쓴 곳이 보이는데, 이는 “千丈”의 의미를 오해한 것이라 할 것이다.


      파주보의 기록이 사성강목과 다른 점은 대략 다음과 같다.
      사성강목 : 강에서 뱃놀이 (遊江上) ⇒ 파주보 : 연못에서 뱃놀이 (遊于池上)
      사성강목 : 높은 절벽 위 (懸崖上) ⇒ 파주보 : 바위 위 (巖上)
      사성강목 : 석함 (石函) ⇒ 파주보 : 석갑 (石匣)
      이외에도 구체적으로 나이를 기록하는 등, 사성강목 기록보다 좀 더 자세하다는점을 들 수 있다.

    즉, 시조탄강설화의 주제인 남평, 물, 높은 장소는 변함이 없으나, 그 내용면에서 약간의 변화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사성강목에는 남평문씨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해풍군 이기가 30여년간 공들여 작성한 남평문씨보를 박사 문행과 나에게 교정을 부탁하였는데

    임진란으로 서울 집에서 일실하였으니 남평문씨보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어 한탄스럽구나.

    (海豊君 積三十年之功 修南平文氏譜 付博士文行曁余校正 壬辰之亂 棄于京家 不知化爲何物 可嘆也矣)


      사성강목에서 말하는 해풍군은 인의공 간(簡)의 외증손이다. 즉, 남평문씨보는 인의공 간 집안의 가승인데,

    파주보의 저자인 극제 문환은 인의공 간의 후손이므로 결국 남평문씨보와 파주보는 동일한 집안의 가승보이다.

    그러므로 파주보는 일실된 남평문씨보에 이어 작성된 가승이며,

    이로 보아 남평문씨보에도 파주보에 수록되어 있는 탄강설화와 유사한 탄강설화가 수록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3. 1731년 신해보

      신해보 탄강설화 92.jpg

    신해보는 1705년에 작성된 을유보를 기초로 순질공 후손들이 작성한 남평문씨 최초의 족보이다.

    을미보는 모계가첩 등 산재한 가승을 참고했다고 한다.

    신해보에도 시조 탄강설화가 수록되어 있는데 앞에서 살펴본 두 문헌에 수록된 내용과 비교하여 보면,

    군주가 쉬고 있는 장소를 “江上”이나 “池上”이 아닌 “바위 아래(其下)”로 표기하여 그 내용이 다르다.

    또한 “江”이나 “池”가 아닌 “澤”을 사용하고 있는 점도 보인다.

    그러나 전체적인 면에서 본다면, 사성강목 기록보다는 파주보 기록에 대한 영향을 더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이기는 하나,

    신해보 기록 또한 구전되어 오던 내용을 참고한 것이라고 한다면,

    두 문헌보다 약간 더 자세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과 시조의 사망시의 나이 등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 이외에는 본질적인 면에서 큰 차이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1731년 신해보에 이어 간행된 족보, 즉, 1735년 을묘보, 1768년 무자보, 1792년 임자보, 1796년 병진보 등은 전부 신해보의 기록을 인용하고 있다.

    (참고로 1767년 초정해보는 원본을 보지 못하고, 대종회 보관 복사본을 참고하였으나, 여기에는 시조 탄강설화가 확인되지 않았다.

    원본을 보유하고 계신 분의 도움울 바란다) 

    다만, 약간의 차이점을 살펴본다면,

    1768년에 작성된 무자보 마지막에 수록된 “(武成)誕降之年 登仕之朝 曾無文獻之可徵故 闕錄焉”은 병진보의 기록이며,

    1796년 병진보는 임자보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신해보에 수록된 시조탄강설화는 대략 다음과 같다.


    남평문씨 세계기사
    무성공 사적
      세상에서 말하기를 호남(호수의 남쪽)에 남평군이 있으며, 남평군의 동쪽에 큰 연못이 있고

    그 연못가에는 바위가 우뚝 솟아 있었는데 높이가 천 길이나 되었다.


      어느 날 군주가 그 바위 아래에서 노닐고 있는데 오색구름이 일어나 바위 위를 감싸더니

    갑자기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므로 군주가 이상하게 생각하고

    즉시 사람을 시켜 사다리를 가져오게 하여 올라가서 살펴보니 석함이 있는지라,

    쇠줄로 묶어서 석함을 끌어내려 바위 아래에서 함을 열고 그 안을 들여다보니

    그 속에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피부는 매우 깨끗하고 용모가 기이한지라. 데려와 거두어 길렀다.


      나이 다섯 살에 문사에 자연 통달하고, 무략이 뛰어났으며, 총명하고 깨닫는 것이 사물의 이치에 통달하였으므로

    문(文)을 성으로 삼고, 다성(多省)을 이름으로 하며, 명원(明遠)을 자(字)로 하니,

    때에 사람들이 그를 부르기를 문군은 총명하기가 일월과 같고, 맑기가 성진과 같아 호를 삼광(三光)이라고 했다.


    14세에 대사도, 18세에 대사마, 대장군이 되었다. 삼중대광보국삼한벽상공신, 태사태부에 추증되었으며, 남평개국백에 봉하였다.


      98세에 돌아하시니, 시호는 무성공이다.

    4. 1736년 병진보


     병진보 탄강설화 92.jpg


    병진보는 서두에서 “始祖 誕降之年 登仕之朝 曾無文獻之可徵故 闕錄焉”라 하여

    시조의 탄강시기와 관직에 나아간 조정(왕조)에 대하여는 기록하지 않는다고 한 다음, “按舊譜”라고 하고 있어,

    구전에서 채록한 내용이 아니라, 가승 및 족보에서 인용한 내용임을 밝히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池”, “岩”, 나이 등을 인용한 것으로 보아 대체적으로 파주보를 많이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石函”, “兜下”, “二十八歲”는 사성강목에서 인용한 부분이며,

    “忽” 등은 신해보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이고,

    “郡宰”, “賜姓”, “貫” 등의 용어는 병진보에서 처음 사용된 점으로 보아 어느 구보인지 명확하지가 않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대체적인 내용으로 보아 큰 차이점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병진보에 수록된 시조 탄강설화는 대략 다음과 같다.


      시조께서 탄생하신 연도, 출사한 왕조에 대하여는 일찍이 문헌의 증거가 없으므로 기록하지 아니한다.

    구보에 이르기를 남평군에 큰 연못이 있고, 연못가에는 높이가 천장이나 되는 높은 바위가 있었다.


      지방 수령이 어느 날 그 밑에서 쉬고 있었는데 문득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바위 위로부터 들려오므로

    사다리를 가져오도록 명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올라가서 그 곳을 살펴보게 하니 석함이 있었다.

    끈으로 묶어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서 살펴보니 그 속에는 피부가 매우 하얀 어린아이가 있었다.  

    군주가 매우 기이하게 생각하고 데려와 길렀더니


    나이 다섯 살에 문사가 솟아나고 무략이 뛰어났다. 드디어 문씨로 사성하고 다성을 이름으로 하며 남평을 본관으로 하였다.


    나이 28세에 공신이 되었다. (혹은 18세에 공신이 되었다고도 하나 상세하지 아니하다.)


    5. 사성강목, 파주보, 신해보, 병진보 비교표

    4보 비교표.jpg


      이상의 내용은 시조 탄강설화에 대한 원시 자료들이다. 1808년 무진신보 이후의 기록은 다음 회로 이어가고자 한다.

         2017년 9월
         小泉 문 점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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