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탐구

  • 조선씨족통보 그 오류와 창씨개명
  • 문씨대종회
    조회 수: 432, 2016.04.16 11:16:59
  • 조선씨족통보 그 오류와 창씨개명

     

    (서론)

    일본은 조선인에 의하여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난 이후, 이미 비밀리에 조선인에 대한 창씨개명을 계획하기 시작하였다.

    1919, 일본은 이미 일본의 성씨 제도인 씨()제도를 조선에서 시행할 안()을 세우고 있었으며,

    1922, 조선총독 제등실(齊藤實)이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한 교육시책이라면서, “먼저 조선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 그럼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無爲), 무능(無能), 악행(惡行)을 들추어 내, 그 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쳐라.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들의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라. 그러면 조선인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될 것이다. 그 때 일본의 사적, 일본의 문화, 일본의 위대한 인물들을 소개하면 동화(同化)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일본(帝國日本)이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고 강조하였고,

    1924일본 및 일본인이라는 잡지 9월호에서는 조선인의 이름은 전부 일본 이름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조선씨족통보는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인의 숭조정신을 제등실의 교육시책에 충실한 내용으로 변질시켜 1924(대정 13)부터 창씨개명이 시작될 때까지 해마다 간행된 서적이다.

    조선씨족통보는 조선의 성씨 유래와 역사 및 같은 씨족을 관향별로 구분한 서적이라 할 수 있는데, 일반적인 성씨관련 서적은 1회성으로 끝났지만, 조선씨족통보는 창씨개명시까지 매년 중간되어 널리 배포시켰다는 점에서 그 목적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인용한 조선씨족통보는 소화 4, 즉 서기 1929년 간행본을 참고하였다. 이를 살펴본 바, 다른 문헌과는 달리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많은 오류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를 단순한 착오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위에서 제등실이 강조한 바와 같이 (창씨개명에 앞서) 우리 조상들에 대한 역사를 상실하도록 유도하면서 조작된 역사를 주입시키고자 하였던 것으로 본다면, 이는 억지일까?

     

    구체적으로 문씨 항목에 대한 원문과 함께 살펴보기로 하자.

     

    (원문)

    文氏

    有百五十六本 系出中國鴈門(見童氏) 文王支孫后 其後周 敬王時 有越大夫 文種字 子禽, 漢 順帝時 有文礱 桂陽太守

     

    (번역)

     문씨는  156()이 있다. 계보는 중국 안문(동씨참조)으로부터 나왔으며, 문왕의 지손후예이다.

    그 후손으로는 주나라 경왕 때는 월나라에 대부 문종자와 아들 금이 있었으며, 한나라 순제 때에는 문농이 있었는데 계양태수이었다.

     

    (설명) 이 얼마나 황당무계한 내용인가?

    필자는 성씨와 관련된 자료를 조금 보았는데, 아직까지 조선씨족통보 이전의 기록으로 이와 같은 기록을 본 적이 없다.

    이는 하나의 창작품이다. 누구의 창작일까? 조선씨족통보의 저자는 윤창현(尹昌鉉)이다.

     

    문씨는 우리나라에서 몇 안되는 고유한 천강설화를 가지고 있는 성씨로서 예로부터 중국과는 무관하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성씨이다. 이는 다른 성씨와는 달리 우리나라 고유의 성씨로서 천강성임을 천명하는 설화가 오래전부터 전하여져 오고 있어, 1597년에 송암 이로에 의하여 작성된 송암세보 사성강목에도 이미 채록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씨족통보는 근거도 없이 지금까지 어느 기록에서도 볼 수 없는 중국 문왕의 지손 후예라 하여 문씨를 중국의 후예로 둔갑시킨 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우리 후손들로 하여금 문씨의 뿌리에 대한 의심을 갖게하고 나아가 우리의 뿌리마저 부인하고자 하는 숨겨진 의도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본관의 수에도 잘못된 점이 있으나 이 부분에 대하여는 생략하고자 한다.

     

    (원문)

    南平 文氏

    始祖 多省 三重大匡壁上功臣 南平伯 武成公 年十四爲大司徒 十八爲大司馬 壽九十八 文氏世居鐵冶縣 鐵冶初屬綾州 后屬南平

    湖之南平郡之東有大澤澤畔有岩屹立千丈 (湖之南 南平郡, 南平郡之東 有大澤, 大澤畔有岩) 郡主一日遊於其下 五雲叢集於巖上 忽聞嬰兒之聲隱隱來 郡主心異之 卽令搆架 觀察之 有石函 以鐵索繫之而 兜下 開函視之 中有小兒 肥膚玉雪 容皃奇異 遂收養之. 年甫五歲 文思自然通達 武略超邁 聰明頓悟 達於事物之理 故因 以文爲姓 多省爲名 明遠爲字 時人稱之 曰 文多省 昭若日月 燦如星辰 號爲三光 十一世孫 江陽郡 益漸 分爲丹城文氏

    曾孫公裕(知門下省事 敬靖公) 公裕子克謙(平章事 忠肅公 配享 明宗室) 克謙子惟弼(司空) 多省後孫弘獻(進士享忠詞)

    十一世孫 益漸 分籍 丹城

     

     (번역)

    남평 문씨

    남평문씨의 시조는 다성이다. 삼중대광벽상공신으로 남평백에 봉하였으며 시호는 무성공이다. 나이 14세에 대사도, 18세에 대사마를 역임하였으며, 98세에 사망하였다. 문씨 세거지는 철야현인데, 철야는 처음에는 능주에 속하였으나 나중에는 남평에 속하였다.

    호수의 남쪽에 남평군이 있고, 남평군의 동쪽에 큰 못이 있으며, 그 못가에는 높이가 천장이나 되는 바위가 우뚝 솟아 있었다. 어느 날, 군주가 그 아래에서 즐기고 있었는데, 오운이 바위 위에 모여들더니, 갑자기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거늘, 마음속으로 심히 이상하게 여겨 즉시 사다리를 가져오게 하여 그 곳을 살펴보니, 석함이 있는지라, 쇠사슬로 석함을 묶어 어렵게 아래로 끌어내려 함을 열고 보니 석함 속에 어린아이가 있는데, 피부가 눈같이 희고 용모가 기이하니 드디어 데려와 길렀다. 나이 다섯 살에 문사가 자연 통달하고 무략이 뛰어나 총명하고 돈오하며 사물의 이치에 통달하므로 성을 문이라 하고, 이름을 다성이라 하였다. 자를 명원이라 하니 사람들이 그를 칭하여 문다성은 밝기가 해와 달과 같고, 빛남이 별과 같아, 호를 삼광이라 하였다.

    11세손 강양군 익점은 분적하여 단성문씨라 하였다.

    증손은 공유(지문하성사 경정공)이며, 공유의 아들은 극겸(평장사 충숙공 배향 명종실)이고, 극겸의 아들은 유필(사공)이다. 다성 후손으로 홍헌(진사 향충사)이 있다.

    11세손 익점은 단성으로 분적하였다.

     

    (설명)

    위에서 붉은 글씨로 표시한 부분은 오류이다.

    첫 째, 강성군(江城君)을 강양군(江陽君)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단순한 오류로 보아야만 할 것인가? 아니면 인용의 오류로 보아야 할까? 강성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태조7, 1398년의 문익점 졸년 기사에 의하면, 강성군으로 증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강성(江城)이란 현재 경남 산청의 별호이며, 강양(江陽)이란 현재 경남 합천의 별호이다.

    필자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조선씨족통보 이전에 강성군이 아닌 강양군으로 잘못 기록된 문헌은 1908년에 간행된증보문헌비고가 유일하다. 그렇다면, 조선씨족통보는 당시 유일한 오류인 증보문헌비고를 인용하였다는 것이 된다. 다만, 최근에 발견된 미국 하버드 옌칭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고려열조등과록에도 강양군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둘 째, “증손 공유라고 기록하고 있다. , 1세 시조 다성 - 2세 탁 - 3세 익 - 4세 공유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 족보가 휘 익을 중시조로 기록하고 있는 정신과 매우 다른 것이다. , 시조의 탄강시기를 알 수 없어 기록이 확실한 휘 익을 기세조, 즉 중시조로 하였을 뿐인데, 이와 달리 기록함으로써 상계에 혼란을 불러 일으키게 한 것이다.

    세 째, 극겸의 아들은 후식과 유필이며, 유필의 관직명은 지문하성사 또는 참지정사라야 타당하다

    네 째, 11세손 익점이라는 부분은 세계의 혼란, 다성 후손 홍헌이라는 부분 또한 후손의 미약함 등을 강조한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다.

     

    (원문)

    丹城 文氏

    始祖 益漸 一云 父尙書汝俊 祖康獻公幹 南平人 恭愍朝 文科左司議大夫右文館提學

    父左正言叔宣 祖典理判書允恪 曾祖開城尹克儉 公甞以書狀官如元 得木花種屬 其舅鄭天益種之 三年大蕃 東方有木花 自此始

    洪武中丁巳 母憂廬幕時 壬辰之亂 人皆避匿 公不爲動 以終 三年

    太宗朝 贈參知議政府事 江陽君 富民候 忠宣公 一云 多省 十一世孫

    (一云子)(贊成靖惠公) 益漸八世孫緯世(坡州牧使享鄕詞)

    益漸後孫緯(高靈縣監享書院) 益漸九世孫致(臣功永原君)

     

    (번역)

    단성 문씨

    단성 문씨의 시조는 익점이다. 일설에 는 아버지 상서 여준이며, 는 강헌군 간으로 남평인이라 한다.

    고려 공민왕조에서 문과에 급제하여 좌사의대부를 거쳐 우문관 제학이 되었다. 는 좌정언 숙선, 는 전리판서 윤각, 曾祖는 개성윤 극검이다. 공이 일찍이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가서 목화씨를 구하여 그 장인 정천익으로 하여금 목화씨를 파종하게 한 지 3년에 크게 번성하니, 동방에 목화가 있게 된 것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홍무년간 정사(1377)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여막에 있을 때, 임진란으로 사람들이 모두 피하고 숨었는데, 공은 피하지도 숨지도 아니하고 3년상을 마치었다. 태종조에 참지의정부사, 강양군, 부민후, 충선공을 증하였다.

    일설에는 다성 11세손이라고도 한다.

    후손으로는 손자 (일설에는 아들이라고 한다) (찬성사 정혜공), 8세손 위세 (파주목사 향 향사), 후손 위 (고령현감 향 서원), 9세손 치(신공 영원군)가 있다.

     

    (설명)

    조선씨족통보는 일운(一云)”이라 하여 지금까지 어디서도 확인되지 아니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휘 익점의 후예들로서는 분노할 수밖에 없는 기록이다. 잘못 기록된 부분을 살펴보자.

     

    첫 째, 조선씨족통보는일설에 이르기를, 익점의 아버지는 상서 여준이며, 할아버지는 강헌공 간(一云 父尙書汝俊 祖康獻公幹)”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도대체 어디에 이와 같은 기록이 있단 말인가? 국조방목에 아버지는 급제 숙선(父 及第 叔宣)이요, 할아버지는 봉익대부 삼사우사 문한학사로 치사한 윤각(祖 奉翊大夫 三司右使 文翰學士 致仕 允恪)이며, 증조부는 검교군기감으로 극검(曾祖 檢校軍器監 克儉)이고, 외조부는 영동정 조진주로 본관은 함안(外祖 令同正 趙珎柱 本 咸安)이다라는 기록이 분명하게 전하고 있다.

    조선씨족통보는 휘 익점의 선조마저 욕보이고 있는 것이다.

    둘 째, ()는 의안공의 아들이며, 강성군의 손자이다. 고려사는 물론이요, 조선실록, 나아가 강성군의 묘지명에 기록된 내용들을 종합하여도 강성군의 아들은 중용, 중실, 중성, 중진, 중계 등 다섯 분임이 이미 역사적으로도 확인되어 있다. 더욱이 문래는 의안공의 아들임에도 래를일설에는 아들이라고 한다.(一云 子)”고 기록함으로 인하여 우리의 계보체계를 무너뜨리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씨족통보의 저자가 계보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박식하였는지는 몰라도 이미 입증되어 있는 객관적인 기록마저 어떠한 입증도 제시하지 아니하면서 이를 부인하는 것은 실수가 아닌 의도된 계획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할 것이다.

    세 째, 강성군에 대한 기록에서도 일설에는 문다성의 11세손이라고 한다.(一云 多省 十一世孫)”고 기록하여 휘 익점에 대한 계보마저 혼동하도록 유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조선씨족통보는 이처럼 휘 익점에 대한 기록을 연이어 오류로 기록함으로써 자꾸 우리 상계를 믿지 못하게끔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후손들은 상계의 내용에 대하여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하며, 지금이라도 잘못된 기록은 바로 잡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강성군을 강양군으로 오류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충선공은 증직이 아니다. 충선은 시호이다.

    네 째, “홍무년간 정사(1377)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여막에 있을 때, 임진란으로 사람들이 모두 피하고 숨었는데, 공은 피하지도 숨지도 아니하고 3년상을 마치었다.(洪武中丁巳 母憂廬幕時 壬辰之亂 人皆避匿 公不爲動 以終 三年)”라는 기록 중에서 당시 왜구의 노략질을 1592년의 임진란으로 둔갑시켜 왜구(해적)에 대한 노략질은 감추고, 일본군이 호의를 베푼 것으로 호도하고 있다. 휘 익점은 로서 무지막지한 왜구를 교화시킨 것이지, 임진란 중의 일본군이 호혜를 베풀었던 것은 아니다. 이처럼 조선에 대하여는 의도적으로 과거 사적마저 부인하면서 일본에 대하여는 사실마저 다른 내용으로 변질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휘 익점 생존시의 임진년은 1352년이다.

    다섯 째, 맨 마지막 줄의 공신 영원군(功臣 永原君)”에서 공신(功臣)”신공(臣功)”으로 잘못 기록하고 있다. 인쇄시 오류로 볼 수도 있겠지만, 위의 내용과 같이 보면, 의도적일 수도 있다.


    (결어)

    조선씨족통보 !!!

    이는 일본의 민족정신 말살정책과 창씨개명이 맞물린 상태에서 1924년부터 창씨개명이 시작될 때까지 매년 간행된 서적으로 그 오류가 너무 많다. 이에  대하여는 이미 다른 성씨문중에서도 확인되어 논란이 일고 있다.

    많은 분들이 성씨와 관련하여 조선씨족통보를 많이 인용하고 있는데 과연 이러한 내용을 알고 인용하고 있는지 의문이 간다.

    조선씨족통보는 잘못되었다는 점 이외에는 인용되어서는 안될 것으로 본다.


    2016년 4월 16일

    소천 문점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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