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탐구

  • 문공유 묘지명
  • 문씨대종회
    조회 수: 265, 2016.04.15 16:45:30
  • 경정공 휘 공유의 묘지명에 가첩이라는 용어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이미 가승이 유행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해동 고려국(海東 高麗國) 검교태자대보 중대부 지문하성사 형부상서(檢校太子大保 中大夫 知門下省事 刑部尙書)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한 문공(文公) 묘지

    검교태자대보 승무랑 행시상서공부시랑 지제고(檢校太子大保 承務郞 行試尙書工部侍郞 知制誥)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사위(史偉)가 짓다.
    공의 이름은 공유(公裕)이나 뒤에 고수(顧壽)로 고쳤고, 자는 항적(亢迪)으로, 남평군(南平郡) 사람이다. 15세에 남성시(南省試)에 응시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 정문(鄭文)의 아래에서 2등으로 합격하고, 25세가 되자 학사(學士) 오연총(吳延寵)과 임언(林彦) 등의 아래에서 (과거에) 우등으로 합격하였다. 29세에 급전녹사(給田錄事)가 되고, 한 해가 지나 장릉(長陵, 仁宗)이 태자로 있을 때 첨사부녹사(簷事府錄事)로 옮겨가 『논어(論語)』,『맹자(孟子)』,『상서(尙書)』를 강독함과 아울러 글씨 쓰는 법을 가르쳤다. 여러 차례 승진하여 주부(主夫, 簷事府注簿)가 되고, 임인년(인종 즉위, 1122)에 임금이 즉위할 때 수행한 공으로 각문지후(閣門祗候)에 임명되었다.
    마침 권신(權臣, 李資謙)이 권력을 장악하여 충신과 의사(義士)들을 모두 유배보내었다. 공은 장인(外舅, 韓安仁)의 잘못에 연좌되어 양주(梁州)로 귀양갔다가, 가덕도(加德島)로 유배지를 옮겼다. 병오년(인종 4, 1126)에 권신이 내쫓겼다가 죽으니, 임금이 공의 곧음을 알았다. 무신년(인종 6, 1128) 봄에 전중내급사 지제고(殿中內給事 知制誥)를 제수받고, 그 해 겨울에는 상서호부원외랑(尙書戶部員外郞)이 되었다. 기유년(인종 7, 1129) 겨울 예부낭중(禮部郎中)으로 청주목부사(淸州牧副使)가 되고, 임기가 다하지 않았는데 임금이 불러 좌사원외랑 충사관수찬관(左司員外郞 充史舘修撰官)이 되었다.
    임자년(인종 10, 1132) 겨울에 시어사(侍御史)가 되었다. 이 때 서경(西京)의 승려 묘청(妙淸)이 사도(邪道)[左道]를 행하면서 정치에 간여하려 하였다. 공이 같은 지위에 있는 이인실(李仁實)과 함께 궁궐에 머리를 조아리며 간언하였으나, 임금의 뜻에 거슬려 고공원외랑 충주목부사(考功員外郞 忠州牧副使)로 좌천되었다. 서경 임원(林原)에 새로이 궁궐을 짓고 태화궁(太和宮)이라고 이름하였는데, 임금이 공이 불러 궁궐 현판의 글씨를 쓰라고 명하니 공이 사양하면서 말하였다. “신이 지난 번에 묘청 등을 마땅히 멀리 쫓아내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그의 말에 따라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 만일 현판의 글을 쓰게 되면 한 마음으로 임금의 뜻을 받드는 일이 아닙니다.”
    임금이 장차 새 궁궐에 가보고자 하여 먼저 서경으로 행차하였다. 묘청이 무리들과 함께 그들의 주장을 신비롭게 하려고, 몰래 떡으로 주머니를 만들고 그 안에 기름을 넣었다. 그것이 대동강 바닥에 가라앉으니 기름이 새어나와 수면으로 떠올랐는데, 이것을 상서로운 기운이라고 말하였다. 임금이 새 궁궐로 행차하자 이에 그 남쪽 바위굴에 등을 밝혀 놓으면서, 수성(壽星)이 상서로움을 바쳐 새 대궐을 만든 왕의 뜻을 축하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새 궁궐 인근에 벼락이 쳐서 소와 말과 나무가 하룻밤 사이에 이삼십 군데나 상하였으며 임금의 말 두 마리가 죽었다.
    임금이 대신들의 의논에 따라 황급히 서경으로 행차를 옮겼다가 마침내 서울로 돌아왔는데, 얼마 되지 않아 서경에서 난을 일으켰다. 그제야 임금이 공의 충성과 의로움을 알고, 호부낭중 동궁시독사 지제고(戶部郎中 東宮侍讀使 知制誥)로 발탁하였다. 병진년(인종 14, 1136) 겨울에 조정에서 청주에 재직할 때 임기를 다 채우지 않았다고 하여 예빈소경(禮賓少卿)으로 황주목부사(黃州牧副使)로 삼았으며, 임기가 차자 예빈소경 태자좌찬선대부(禮賓少卿 太子左贊善大夫)에 임명하였다. 경신년(인종 18, 1140)에 비서소감 동궁시강학사(秘書少監 東宮侍講學士)가 되고, 신유년(인종 19, 1141)에 병부시랑(兵部侍郞)이 되었으나 나머지는 이전과 같게 하였다. 2년이 지나 우간의대부 형부시랑 동궁시독학사(右諫議大夫 刑部侍郞 東宮侍讀學士)가 되고, 승진하여 상서좌승 지어사대사(尙書左丞 知御史臺事)에 이르렀다.
    정묘년(의종 1, 1147)에 국자감대사성 보문각학사 지도성(國子監大司成 寶文閣學士 知都省)이 되고, 무진년(의종 2, 1148) 봄에 산기상시 보문각학사(散騎常侍 寶文閣學士)가 되었으며, 기사년(의종 3, 1149) 겨울에는 형부상서 수문전학사 지제고(刑部尙書 修文殿學士 知制誥)가 되었다. 천덕(天德) 3년(의종 5, 1151) 여름 서경지유(西京知留)가 되어 여섯 달 동안 근무하였으며, 불려와 형부상서(刑部尙書)가 되고, 또 고쳐서 병부 권삼사사(兵部 權三司使)가 되었다. 계유년(의종 7, 1153) 정월 일에 지금의 임금이 태자를 위하여 부(府)를 세우니, 임금이 특별히 공에게 대자좌첨사(大子左詹事)를 제수하고 책봉에 관한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그 해 여름에 드디어 형부상서 집현전학사 지제고 겸 대자빈객(刑部尙書 集賢殿學士 知制誥 兼 大子賓客)에 제수되고, 관례에 따라 검교태자대보(檢校太子大保)가 되었다. 을해년(의종 9, 1155) 여름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가 되면서 나머지는 모두 전과 같이 하였으며,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병자년(의종 10, 1156) 여름 지금의 관직을 받았다.
    공은 풍채가 당당하고 문장이 활달하였으며, 특히 예서(隸書)를 잘 썼다. 병신년(예종 11, 1116)에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중국 조정에 들어가게 하였는데, 사신의 행차를 잘 도울 사람을 뽑으니 공이 임금의 뜻에 따라 사신을 수행하였다. 일찍이 사신이 되어 금(大金)에 들어갔었는데, 다시 금자광록대부 상서좌복 지추밀원사(金紫光祿大夫 尙書左僕 知樞密院事)로 남평군개국자(南平郡開國子)가 되어 식읍(食邑) 300호를 받으면서, 금나라 황제의 즉위를 축하하는 하등극사(賀登極使)가 되었다. 일찍이 안▨(按察?)이 되었고 동북·서북 양계병마(東北·西北 兩界兵馬)의 도통(都統)이 되었다.
    공의 선조는 문반직과 무반직으로 조정에 벼슬을 하였는데, 조부, 증조부, 고조부에 대해서는 가첩(家牒)에 갖추어 기록되어 있으므로 여기에 다시 적지는 않는다. 아버지 익(翼)은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를 지냈으며, 네 아들을 낳았다. 장남은 공인(公仁)이고, 차남은 공원(公元)인데, 모두 총재(冢宰)가 되었다. 3남 가관(可觀)은 조계종(曹溪宗)의 대선사(大禪師)가 되었고, 공은 막내이다. 맏아들과 작은 아들, 막내아들이 서로 차례로 재상이 되니, 세상이 재▨(宰▨)라고 부르면서 대단히 영예롭게 여겼다.
    공이 추밀(樞密)에 있었는데, 천문(天文)에 변고가 일어나자 일자(日者)가 추부(樞府)에 상응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공이 숙직하는 동안 홀연히 몹쓸 병을 얻어 끝내 회복하지 못하니, 세상 사람들이 크게 쓰이지 못한 것을 탄식하였다.
    공에게는 아들이 세 명이 있다. 장남 극겸(克謙)은 이미 과거에 급제하여 지금 관직이 7품에 올랐다. 둘째는 극순(克純)이고, 막내는 극역(克易)인데 모두 음서를 받아 이미 관직을 가지고 있다. 딸은 세 명이 있으니, 큰 사위 정증(鄭拯)은 지금 내시(內侍)로서 관직이 형부원외랑[秋部外郞]이고, 둘째 사위 윤자고(尹子固)는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막내 사위 이세창(李世昌)은 역시 가음(家蔭)를 받아 조정에 이름을 올렸다.
    태세(太歲) 기묘년(의종 13, 1159) 2월 12일에 임금이 관리에게 명하여 도구를 갖추어 장례를 돌보라고 명하니, 백학사(白鶴寺)
    <뒷면>
    서남쪽 기슭에 장례지냈다. 공의 아들들과 사위들이 묘지를 지어줄 것을 부탁하니, 내가 이에 명(銘)을 짓는다.
    공의 두 형에게는 하늘이 그 후사를 아꼈으나
    나머지 복이 모여져 공은 이에 아들을 두었다.
    뉘라서 그 뒤를 알리요, 그 가문이 커지리라는 것을,
    충효와 학문으로 근원을 삼았도다.
    영원히 좋은 땅으로 들어가려고 무덤이 이미 이루어지니
    아들과 사위들이 훌륭한 공의 자취를 기록하였네.
    나를 통해 공의 명성을 더욱 알려주고자
    공의 평생을 ▨(기록하여?) 영원히 전하려 하네.
    내가 솜씨가 없다고 사양하였지만 끝까지 거부하지 못하여
    소매를 걷어 얼굴을 씻고 붓을 들어 서술하노라.
    충성은 훌륭한 덕인데 공은 실로 그것을 지녔고
    문장은 나라의 아름다움인데 공이 실로 그것을 갖추었으니
    천만세에 전해지도록 산자락에 묘를 남긴다.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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