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탐구

  • 고려사 충숙공전
  • 문씨대종회
    조회 수: 231, 2016.04.15 15:58:17
  •   고려사 충숙공전 전문입니다.

      문극겸(文克謙)은 자()가 덕병(德柄)이며 남평군(南平郡) 사람이다. 아버지 문공유(文公裕)는 지문하성사 집현전태학사(知門下省事 集賢殿大學士)를 지냈으며, 시호(諡號)는 경정(敬靖)이었다. 문극겸은 처음에 백부(伯父) 문공인(文公仁) 때문에 음서(蔭敍)로 산정도감판관(刪定都監判官)에 보임(補任)되었다. 국제(國制)에 남색의 관복[藍衫]을 입은 참외관(參外官)이 과거에 응시하면, ()에 따라 3번밖에 부거(赴擧)할 수 없었다. 문극겸이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자 탄식하며 말하기를, “흰 옷 입은 벼슬이 없는 선비[白衣]10번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데 남색 관복의 참외관은 어찌하여 3번밖에 부거할 수 없는 것인가?”라고 하고 5번까지 부거할 수 있도록 할 것을 요청하자, 조정에서 논의하여 문극겸의 의견을따라 항규(恒規)를 삼았다. 문극겸은 관직에 있으면서도 항상 학업을 그만두지 않아서 의종(毅宗) 때 드디어 과거에 급제하였다..

    문극겸(文克謙)여러 차례 승진하여 좌정언(左正言)이 되었는데, 궁궐 문 앞에 엎드려 상소(上疏)올려 아뢰기를, “환관[宦者] 백선연(白善淵)이 상벌[威福]을 제멋대로 휘두르며 몰래 궁녀인 무비(無比)어울려추행(醜行)을 일삼았습니다. 술인(術人) 영의(榮儀)는 사도(邪道)를 고집하여 임금에게 아첨하고 백순궁(百順宮관북궁(館北宮) 2궁을 설치하였습니다. 사사로이 재물을 숨겨두고 복을 기원하려고 재()와 초제(醮祭) 비용으로 쓰고 있었는데, 백선연과 함께 그 일을 관장하였습니다. 무릇 양계병마사(兩界兵馬使)5도 안찰사(按察使)들이 임금께 하직 인사를 올리는 날에는 반드시 두 궁에다 술자리를 베풀어서 지방으로 나가는 것을 위로하였고, 각각 토산물[方物]을 바치게 하되 바치는 재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성적을 매기고[殿最] 있습니다. 심지어 가호(家戶)에게도 재물을거두어 민()의 원망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최포칭(崔襃稱)은 직책이 중요한 것을 관장하는 것인데, 권세를 중외(中外)에 뻗치고, 탐욕이 끝이 없어서 자기에게 아부하지 않은 자는 반드시 헐뜯어 해를 입혔기 때문에 재물이 거만(鉅萬)에 이르렀습니다. 청컨대 백선연과 무비는 목 베고 영의는 쫓아내어 목부(牧夫)로 삼으실 것이며, 최포칭은 파직시켜 나라에 사죄하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더구나 상소문 가운데왕의 침소(寢所) 안에서의 일까지 언급하였으므로, 왕이 크게 노하여 그 상소문을 불태웠다. 최포칭이 궐에 나아가 해명하기를 요청하니, 왕이 문극겸을 불러 서로 대면하고 시비를 가리게 하였다. 문극겸의 말이 매우 적절하고 지극하였지만 결국은 황주판관(黃州判官)으로 폄직(貶職)되었다.처음에 문극겸이 상소문을 기초(起草)하였으나 간의대부(諫議大夫) 이지심(李知深)과 급사중(給事中) 박육화(朴育和), 기거주(起居注) 윤인첨(尹鱗瞻) 등은 감히 서명하지 못했다. 문극겸이 좌천된 것을 보고도 정사를 보는 것이 태연하니 당시 사람들이 함께 놀던 잘난 인재들이여! 낯가죽이 어찌 그리 두꺼운가?’라는 구절을 외우며 비웃었다. 문극겸은 황주에 있을 때 향리(鄕吏)와 민이 애모하였고, 다스리는 것에 명성이 있었다. 그러나 권귀(權貴)와 근신(近臣)들이 그에게 묵은 감정을 품고서 미미한 잘못을 얽어 면직할 것을 청하였다. 왕도 역시 지난 일을 노여워하며 또다시 그를 진주판관(晋州判官)으로 폄직시키니, 유사(有司)에서 아뢰기를, “문극겸은 곧은 신하이니 연이어 외관(外官)으로 좌천시켜 언로(言路)를 막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합문지후(閤門祗候)를 제수(除授)하고 후에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 승진시켰다..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문극겸(文克謙)은 성() 안에서 숙직하고 있다가 변란의 소식을 듣고 도망쳐 숨었는데 어떤 병사가 좇아와 붙잡으니 문극겸이 말하기를, “나는 전에 정언(正言)을 지낸 문극겸이다. 임금께서 내 말을 따랐다면 어찌 오늘에 이르렀겠는가? 바라건대 잘 드는 칼로 단번에 죽여라.”라고 하자 병사가 기이하게 여겨 생포하여 여러 장군들 앞으로 데리고 갔다. 장군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우리가 평소에 명성을 들어온 사람이니 죽이지 말라.”라고 하고는 궁성(宮城)에 가두었다. 의종(毅宗)쫓겨나남쪽으로 가면서 말 위에서 탄식하며 이르기를, “()이 일찍부터 문극겸의 말을 들었다면 어찌 이런 욕을 당했겠는가?”라고 하였다.명종(明宗)이 즉위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관직을 제수하면서 문극겸을 석방하고 그로 하여금 비목(批目)을 작성하게 하자, 이의방(李義方)이 왕에게 아뢰어 문극겸을 우승선 어사중승(右承宣 御史中丞)으로 임명하게 하였다. 문신(文臣) 가운데 이공승(李公升) 같은 사람들은 많이들 문극겸의도움으로 죽음을 면하였으며 무관(武官)들 역시 그에게 의지하여 옛 일에 대한 자문을 많이 구하였다. 얼마 후 용호군대장군(龍虎軍大將軍)을 겸임하였으며 재상이 되어서는 상장군(上將軍)을 겸임하였다. 문극겸에게는 혼인하지 않은 딸이 있어서 이의방의 동생인 이린(李隣)에게 시집보냈는데 이 때문에 계사년(1173)의 변란 때 일족이 모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김신윤(金莘尹) 등이 상소(上疏)하여 아뢰기를, “승선(承宣)은 임금의 목구멍과 혀로 오직 임금의 말씀을출납(出納)하는 일만을 허락하는 것이 옳습니다. 지금 이준의(李俊儀)와 문극겸은 대성(臺省)의 직을 겸하여 중간에서 권세를 부리고[用事] 있으니 청컨대 겸직에서 해임하소서.”라고 하였으나 왕이윤허(允許)하지 않았다. 이튿날에도 간관(諫官)이 궁궐 문 앞에 엎드려 힘껏 간쟁(諫爭)하자 이준의를 위위소경(衛尉少卿)으로, 문극겸을 태부소경(太府少卿)으로 고쳐 임명하였다..

    하루는 근신(近臣)들이 왕의 장수(長壽)를 비는 잔치가한밤중이 되어도 끝나지 않고 왕의좌우가 점점 더 떠들썩해졌다. 문극겸(文克謙)이 간()하며 아뢰기를, “이는 전 왕이 폐위된 까닭인데 어찌 경계하지 않으십니까?”라고 하며 임금에게 내전(內殿)으로 들어 갈 것을 권하자 드디어 잔치가 끝났는데, 이준의(李俊儀)는 성을 내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후 문극겸(文克謙)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옮겼다가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로 임명되었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가 되었으나, 송유인(宋有仁)과 틈이 생겨 수사공 상서좌복야(守司空 尙書左僕射)로 좌천되었다..

    문극겸(文克謙)사공(司空)에 임명된 이후로는 녹봉(祿俸)을 받지 않으니 세상에서 그의 청렴함에 감복하였다..

    문극겸(文克謙)어머니의 상()을 당하고 해를 넘겨 기복(起復)하자 원래 직위로 복직하였고, 잠시 참지정사(叅知政事)로 있다가 중서시랑평장사 판호부사 태자태보(中書侍郞平章事 判戶部事 太子太保)에 올랐다..

    처음에 예관(禮官)이 아뢰기를, “태후(太后, 공예태후)의 기일이 11[仲冬]이므로 10월에 팔관(八關)의 의례를 시행할 것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재상들[相府]에게 의견을묻자, 문극겸(文克謙)이 아뢰기를, “태조(太祖)께서 처음으로 팔관회(八關會)를 여신 것은 대개 천지신명을 위한 것입니다. 후대의 임금이 다른 일을 이유로 날짜를 앞뒤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태조께서 천지신명께 기도하시며 이르시길, ‘바라옵건대 대대로 11월에는 나라에 상사(喪事)가 없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불행하게 상사가 난다면 국운이 장차 쇠하려는 징조인지를 의심하게 됩니다. 이런 까닭에 후삼국을통합한 이래로 음력 11월에는 나라의 상사가 없었는데 지금 이런 일이 생긴 것은 바로 나라의 재앙입니다. 또한 10월에 팔관회를 여는 것은 진실로 태조의 뜻이 아니니 예관이 아뢴 바를 허락하셔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니 왕이 그의 말을좇았다..

    명종(明宗)15(1185) 문극겸(文克謙)판예부사(判禮部事)가 되었는데, 그때 한문준(韓文俊)의 반차(班次)가 두 번째였고 그 다음이 문극겸이며 그 다음이 최세보(崔世輔)였다. 한문준이 총재(冢宰)가 되자 문극겸은 당연히 아상(亞相)으로 옮겨야 했지만 그러나 최세보의 윗자리에 있지 않으려고 먼저 스스로 그 자리를물러나 사양하고 최세보가 판병부사(判兵部事)로서 아상에 오르게 하고 자신은 그 다음의 자리에 앉으려 하였다. 최세보 역시 정중하게 사양하며 말하기를, “내가 문공(文公)에게 받은 은혜가 참으로 많은데 어찌 감히 그 윗자리를 차지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왕은 예부(禮部)가 병부(兵部)보다 위에 있었으므로, 문극겸을 판예부사(判禮部事)로 임명하여 아상으로 삼고 최세보를 다음으로 삼았는데 식자(識者)들이 그들의 양보를 많이들 칭찬하였다.이듬해에 중서성(中書省문하성(門下省) 두 성과 판병부사를 겸직하다가 곧이어 권판상서이부사(權判尙書吏部事)가 되었다..

    문극겸(文克謙)이 명종(明宗)19(1189)에 죽으니, 나이는 68세였으며, 왕이 사흘간 조회(朝會)를 그만두었고, 시호(諡號)를 충숙(忠肅)이라 하였다..

    문극겸(文克謙)성품은 효성과 우애가 있었고 자상하고 인자하였으며 충성스러운 바른 말을 하였고 정직하였다. 식사할 때의 반찬은 몇 그릇을 넘지 않았으며, 자수로 무늬를 놓은 옷은 입지 않았다. 세 번이나 과거[禮闈]를 주관하면서 이름난 선비들을 많이 뽑았으므로 당시 어진 재상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그러나 권호(權豪)들의 청탁을 들어주느라 현부(賢否)를 살피지 않아 전주(銓注)에 잘못된 일이 많았다. 또 자기의 어린[髫齔] 자제들에게도 관직을 주었으며 종을 나누어 보내 전원(田園)을 널리 확장하였으므로 당시의 여론[時議]이 애석하게 여겼다..

    문극겸이 명종과 시를 주고 받다

    왕이 일찍이 시() 한 수를 지어 문극겸(文克謙)에게 하사하며 이르기를, “한 치 되는 마음[靈臺] 속에 온갖 일 들어오니, 오직 근심 걱정만 나날이 깊어지네. 짧은 생각 옹졸한 지혜 한꺼번에 끊기 어려워, 천 갈래 흰 터럭만 상투 끝에 가득하네.”라고 하였다. 문극겸이 화운(和韻)하여 아뢰기를, “세월이 흐르고 흘러 남몰래 엄습하니, 나라 위한 생각만 날로 깊어지네. 돌아보니 님의 은혜 아직 갚지 못했는데, 무정한 백발(白髮)만 상투에 가득하구려.” 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두 시에서 모두 시들어 없어질 기운이 보인다고 논평하였다. 왕은 결국 폐위당하고 문극겸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으니, 대저 시참(詩讖)이 되지 않았다고 반드시 말할 수 없도다..

    문극겸은명종(明宗)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문극겸(文克謙)아들은 문후식(文候軾)과 문유필(文惟弼)이다. 문유필은 벼슬이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까지 이르렀는데, 그 아내가 가신(家臣)과 간통하다가 발각되자 최충헌(崔忠獻)이 가신을 먼 섬으로 유배 보냈다. 문유필의 5대손인 문달한(文達漢)은 따로 전기(傳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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